사진학개론 김경만 감독이 좋아하는 스트리트 포토그래퍼 비비안 마이어.
1926년 2월 1일 - 2009년 4월 21일
역설적이다. 대담하다. 기이하다. 괴짜이고 은밀하며 비공개적인 여자다.
참 재밌는 것은 비비안 마이어에 대한 평가와 기억이 모두 다르다는 느낌.
마찬가지로 비비안 마이어의 사진도 그 평가가 제각각이란 것이 흥미롭다.
강렬한 사진, 위트있는 사진, 기하학적 사진과 역사적 사진... 뭐 이런 표현이 있어야 하는데 비비안 마이어는 정확하게 한 줄로 표현하기가 힘들다.
비비안 마이어의 이런 궁금증과 신비로움이 다큐멘터리 영화화까지 이어졌다.
비비안 마이어를 찾아서.
2007년 시카고 역사에 대한 책을 쓰려고 존 말루프는 집 건너편에 있던 경매장에 가서 시카고 사진을 찾았다.
거기서 존 말루프는 필름이 가득한 박스를 380달러에 낙찰 받는다.
비비안 마이어의 필름과 사진들은 상자에 담겨 유료 창고에 보관되다 2007년 창고 임대료가 밀려 경매에 부쳐지면서 방대한 양의 필름이 들어있던 상자도 경매에 나온 것이었다.
스캔을 하고 원판을 버렸다는데 이유는 필름의 주인, 사진작가를 구글에서 검색해봤지만 단 한 건도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유명 갤러리에 연락을 해봤지만 듣보잡 사진작가의 사진은 별 반응을 못얻었고 존 말루프는 200장을 플리커에 올린다.
그런데 대중의 반응이 굉장히 좋았다.
존 말루프는 비비안 마이어가 누구인지 쫓게 되면서 영화는 시작한다.
존 말루프는 비비안 마이어의 작품을 모두 모아야겠다고 생각했고 다른 박스들을 사간 사람들을 찾아 다시 구입했다.
존 말루프는 필름 뿐만 아니라 영상물과 옷과 편지, 수표 등 비비안 마이어의 모든 경매품을 모으려 노력했다.
그러던 어느 날, 구글에서 비비안 마이어 검색이 되었는데 바로 부고 소식, 비비안 마이어가 죽었다는 것.
필름통에 있던 주소를 전화번호부에서 찾아 전화를 거는데 전화를 받은 남자는 비비안 마이어가 자신의 유모였다고 말한다.
이 부분에서 우리는 소름 ㅇㅇ
사진 출처 : 영화 비비안 마이어를 찾아서
수많은 필름통을 현상도 안 한 미스터리 인물 비비안 마이어가 유모라니.
비비안 마이어는 자식이나 남편, 애인 등 가족이 없었던 완전히 홀로 살았던 사람이었다.
비비안 마이어의 물건이 있냐고 물었더니 그녀의 물건을 보관하고 있는 라커 청구서가 있다고 했고 버리려고 했는데 와서 도와달라고 했고 가지고 싶은 것이 있으면 가지라고 했단다.
그곳에 가니 어마어마한 비비안 마이어의 물건이 있었고 박스 테이프로 봉인된 가죽 가방이 나온다.
비비안 마이어는 엄청난 수집광이었다.
그 박스 안에 필름통이 가득했고 1만 여장의 원판, 현상 안 된 컬러 필름통이 700여 개, 그리고 흑백 필름통이 2000여 개.
수많은 비비안 마이어의 물건을 정리할 엄두가 안났고 현대미술관 사진부에 사진을 보내봤지만 돌아온 이야기는 불행히도 이 사진들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답이었다.
그리고 존 말루프는 직접 해야겠다고 생각하여 시카고 컬쳐센터에서 전시회를 열었고 센터 역사상 최고의 관람객을 모았다고 한다.
이 부분이 매우 의미있는 대목.
존 말루프는 인터뷰에서 자신의 임무는 비비안 마이어를 역사 책에 넣는 것이라고 했다.
방송, 신문 등 언론에서는 앞다퉈 비비안 마이어를 다뤘고 사진계에서는 비비안 마이어의 사진을 재평가하기 시작했다.
진정한 눈이 있고 인간 본성에 대한 실제의 지식이니 뭐니 추앙했다.
참 많은 걸 느끼게 되지 않나?
비비안 마이어 작품은 지금 봐도 상당히 구도가 깨끗하고 프레이밍 기술이 뛰어나면서도 촌스럽지 않다.
여기서 참 재미있는 점이 또 하나 있는데 비비안 마이어는 다작을 한 작가다.
무려 그 시대에 15만여 장의 사진 원판을 가지고 있었다.
로버트 프랭크의 스퀘어 포맷
사진작가 리세트 모델 lisette model 1901-1983
리셋 모델 자화상
롤라이플렉스로 찍은 비비안 마이어 자화상
다이안 아버스
헬렌 레빗
이렇게 보면 비비안 마이어는 사진을 정말 좋아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좋아하는 정도가 아니라 거의 필름 안에 빠져 있었다고 볼 수 있겠다.
사진 신문을 구독하고 또 비비안 마이어의 사진 속에 등장하는 1954년 뉴욕 현대미술관 조각공원, 그곳에서 유명한 사진작가들의 사진전을 구경했던 것 같다.
시카고 미술관에서 그림을 찍은 사진도 나왔으니 미술 관람도 했고 영화도 자주 본 것 같다.
8mm, 16mm 비디오까지 촬영했다.
정말 비운의 천재인가?
마이어는 여러 집에서 보모를 하고 가정부와 장애인, 노인 간병인 등의 일을 했다.
유명한 방송인 필 도나휴의 집에서도 일했는데 면접 보는 날 자신의 사진을 찍었다고 한다.
재밌는 건 비비안 마이어가 쓰레기통 안을 계속 찍더라는 것.
비비안 마이어는 인싸로 인스타 셀카의 원조라고나 할까?
자신의 사진을 많이 찍었다.
남자 셔츠 입기를 좋아했고 군화 같은 것을 신었다고 한다.
머리는 짧게 커트하고 흡사 50년대 소련 노동자 같은 복장이었다고 증언하는 이도 있다.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항상 카메라를 목에 걸고 있었다는 말을 한다.
1957년 마이어는 일을 관두고 푸에르토리코와 남아메리카를 여행했다고 하는 책이 있고 영화는 좀 다른데
영화에서는 1959년 비비안이 주인에게 세계여행을 가겠다며 8달 뒤에 돌아온다고 했다는 것.
인도, 홍콩, 마닐라, 방콕, 싱가포르, 이집트, 예맨, 제노바, 파리 등을 혼자서 여행했다. 아니 카메라와 함께!
그야말로 온전히 자신을 위해 인생을 살았던 행복한 여성 아닌가?
세계 여행 사진이 수천 장 나왔다.
남성들을 지나치게 경계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공격적이고 부적절한 행동이 많았다는 증언이 있었다.
자신을 스파이라고도 하고 프랑스 억양을 썼지만 뉴욕 출신이고 심지어 이름도 안 가르쳐주고 다른 이름을 얘기하고 주위 사람들이 비비안 마이어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 그는 자신을 숨기려고 했던 것일까? 아니면 현실이 싫었던 것일까?
신문에 대한 집착. 온 방안을 신문으로 채워 바닥이 내려 앉는 지경.
비비안 마이어가 녹음한 내용을 보면 현 정치 상황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는 질문도 나오고 닉슨에 대한 의견을 인터뷰하고 탄핵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냐고 묻는데 여성이 모르겠다고 답하자 "의견이 있어야죠. 여자들도 자기 의견이 있어야해요"라고 말한다.
87년 어느 집에서 구직 면접을 봤는데 당시 마이어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저는 제 인생과 같이 이 집에 들어옵니다. 제 인생은 상자들에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마이어가 알하기 위해 집에 도착했을 때 상자가 200여 개였다고 한다.
이 상자들을 보관할 장소가 없으니 창고들에 맡겼고 창고 여기 저기에서 독촉장이 도착했다.
말년에는 자금의 압박이 심했고 거의 노숙자로 살았다고 전해지는데 후에 보모로 엄마처럼 돌봐주던 비비안 마이어에게 매튜와 레인이 숙소를 제공해주었다고 한다.
‘영원한 아웃사이더’, ‘보모로 산 천재 예술가’, ‘예술 세계에서 가장 흥미롭고 강렬한 수수께끼’, ‘불운한 성공’. 기묘하고도 아이러니컬한 수식어구들이 가장 잘 어울리는 사진가 비비안 마이어.
그가 찍은 사진의 양은 무려 하루에 필름 한 통씩 50년을 찍어야 가능한 분량이다.
그는 일평생 카메라를 친구로 세상을 만났고 소통했다.
나는 비비안 마이어를 비운의 천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비비안 마이어는 다른 비운의 여성들과 달리 평생 자신이 하고 싶은 작업을 했기에 행복했을 것이라 생각하고
간직만 했던 필름은 언젠가 자신의 분신이 되어 세상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전해줄 것이라 믿었을 것이다.
비비안 마이어는 이제 사진 역사에 들어가는 훌륭한 작가가 되었다.
혹자는 죽어서 유명해지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냐고 하겠지만 그건 매우 짧고 얕은 생각이다.
중요한 것은 언제 유명해지냐, 언제 성공하느냐가 아니라 일평생 하고 싶은 일을 하며 후회없이 살았냐가 중요한 것 아닐까?
이후 비비안 마이어가 유명해지자 저작권 분쟁이 일어났다. 평생 외롭게 한 푼의 재산도 없이 유족도 유언도 없이 세상을 고독하게 떠나간 그에게 저작권 수익 상속자 10명이 나타난 것이다.
비비안 마이어 나는 카메라다
비비안 마이어 셀프 포트레이트 조기 품절 예상
“파트너스 활동을 통해 일정액의 수수료를 제공받을 수 있음"
사진 및 자료 출처 : 영화 비비안 마이어를 찾아서, 서적 비비안 마이어 나는 카메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