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넬과 스트라빈스키 中 - 봄의 제전(Rite of Spring)
스트라빈스키와 야수파.
스트라빈스키는 이고르 표도로비치 스트라빈스키(Игорь Фёдорович Стравинский, 1882년 6월 17일 ~ 1971년 4월 6일)은 러시아의 작곡가다.
발레곡 《봄의 제전》
《불새》
《페트루시카》
《설교, 설화 및 기도》(1961년)
칸타타 《아브라함과 이삭》(1963)
합창곡 《케네디의 추억을 위하여》(1965)
《시편교향곡》(1945)
《미사》(1948)
《장송적 노래》
스트라빈스키가 봄의 제전을 발표하고 나서 기존 음악계는 패닉할 수 밖에 없었다.
기존 현악기 중심 관현악의 일반적인 편성을 거부하고 원시적인 리듬, 격렬한 효과로 충격을 주었다.
피아니스트 임주희, 스트라빈스키 - 불새모음곡 중 지옥의 춤
이교도들이 봄의 신을 예찬하기 위해 산 제물을 바치는 엄숙한 제전 장면에서 보이는 원시적인 리듬은 귀족들과 전통 음악계 인사들을 모욕하는 수준이었다. 반면 진보적인 평론가는 스트라빈스키의 리듬에 앞 사람 머리를 때리며 빠져들었다고 한다.
불협화음과 악기의 파격적인 활용, 그리고 새로운 구성.
예를 들면 불규칙적인 강세, 잦은 변박, 리듬의 불규칙성, 불협음 등이 기성 음악인을 충격에 빠트린 것이고 더불어 관악기가 선율을 연주하고 현악기가 리듬을 만드는 예측하기 힘든 도발.
회화에서 야수파의 충격과 비교해볼 수 있겠다.
원색의 물감 덩어리와 거친 선.
스트라빈스키도 야수파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본다.
작곡가 스트라빈스키 어록
' 더 많은 제약을 부과할수록 더 많이 자유롭다.'
'나는 일단 모든 기술을 다 배운 다음 두고 갈 것을 결정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야수파(野獸派) 또는 포비즘(fauvism)
현대 미술을 여는 20세기 초반의 모더니즘 예술에 등장했다가 곧 사라진 미술 사조.
강렬한 표현, 강렬한 색과 선.
앙리 마티스와 앙드레 드레인
기법상의 특징은 강한 붓질과 과감한 원색 처리, 그리고 대상에 대한 고도의 간략화와 추상화.
눈에 보이는 색채가 아닌 마음에 느껴지는 색채를 표현.
단순성과 강렬함으로 무장한 앙리 마티스의 대표작 <춤>
260X390cm의 큰 그림으로 그린 댄스라는 작품.
그림이 정교해질수록 주제가 분산된다.
디테일해질수록 정교해질수록 감상자는 기법과 기교에 빠져든다.
생명력, 에너지, 파워, 역동성, 이 그림에서 우리는 그러한 강렬함 이외에 무엇에도 방해받지 않는다.
그러면서 생각이 깊어지는 것.
자세히 관찰하면 이 그림에 쓰인 색이 단 3가지 색깔이라는 것에 놀라게 된다.
이 3가지 색깔이 필자의 눈에는 RGB로 보이는데 이것은 우연의 일치일까?
바로 빛의 삼원색이다.
빛의 경우에는 빨간색, 초록색, 파란색이 삼원색이고 염료나 색소, 물감, 인쇄의 경우에는 자홍색(magenta), 노란색(yello), 남색(cyan)을 삼요소로 본다.
색의 삼원색은 모두 같은 양으로 섞으면 검은색이 되어 감산 혼합이라고 한다.
빛의 삼원색은 모두 같은 비율로 합하면 흰색이 되어 이를 가산 혼합이라고 한다.
염료나 색소의 경우에는 자홍색(magenta), 노란색(yello), 남색(cyan)을 쓰는데 우리가 사진을 인쇄할 때도 CYMK를 쓴다.
RGB. CMYK
모니터로 보면서 디자인을 하고 그것을 출판하려고 인쇄했을 때, 포스터를 만들 때, 전단지를 만들 때
다 만들고 나서 인쇄소에 보내니 CMYK 모드로 달라고 한다.
왜냐하면 모니터에서 보는 것은 RGB인데 이것이 더 풍부한 색의 표현을 할 수 있고 CMYK로 바꿨을 때 어두워지거나 탁해지는 현상 때문이다.
마티스가 본격적으로 그리기 시작하기 전 단계의 그림.
항상 기본을 알고 변칙을 쓰라고 했던가?
피카소처럼 마티스도 그림을 못그리는 사람이 아니라는 증거 그림.
야수파는 마티스, 마르케, 카므왕, 망갱을 중심으로 뒤피, 프리에스, 브라크, 블라맹크, 드랭, 반 동겐 등 참여.
기성 회화를 흔드는 젊은 패기와 야심.
파괴와 혁신, 조금씩 칠해가는 형식이 아니라 단숨에 그어버리는 원색의 붓 터치.
하지만 야수들의 혁명은 9년 정도 지속되고 각자의 특성과 본질에 따라 다른 미술 세계로 발전하게 된다.
고정관념을 깨고 강력한 혁명을 꿈꿨던 야수파의 활동은 현대미술로 가는 교두보 역할을 하지만 추한 그림, 미치광이들의 반란 등의 조롱을 받은 것처럼 지나친 형식적 특성이 감상자에게 감동을 주는데 실패한 것이 아니냐는 개인적인 느낌이 있다.
추상 표현주의의 거장 마크 로스코.
그의 그림을 감상한 사람들이 눈물을 흘린다는 이야기가 많은데 왜 그의 그림에 눈물을 흘리는 걸까?
마크 로스코는 이렇게 말한다.
내 그림 앞에서 우는 사람은 내가 그것을 그릴 때 느낀 것과 똑같은 종교적 경험을 하는 것이다.
그를 따라 다니는 표현.
추상표현주의, 초현실주의, 미니멀리즘, 컬러 필드, 표현주의, 근대 미술.
애플의 스티브 잡스가 사랑한 미술가.
Mark Rothko
American, born Russia (now Latvia). 1903–1970
로스코의 그림을 보고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는 이유는 무엇인가?
러시아에서 태어난 로스코는 일을 찾아 뉴욕으로 갔다.
화가 막스 웨버를 만나면서 로스코의 인생은 변하게 되는데 재밌는 것은 막스 웨버가 앙리 마티스에게 그림을 배운 적이 있다는 것.
막스 웨버에 의해 현대 미술의 대표 야수파와 입체파가 로스코에게 전해진다.
기존의 질서를 무너뜨린 놀라운 유럽의 현대 화풍을 접하게 되면서 로스코는 심취하게 되었고
'작품을 만드는 것은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라는 깨달음을 얻는다.
1930년대 Mark Rothko 초기 작품들
"나는 예쁜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을 생각하게 만들기 위해 왔다"
- 마크 로스코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 사이 뉴욕에는 많은 유럽의 아티스트들이 모여들었고 수많은 갤러리에서
각자의 방식대로 작품 속에 감정을 담아내는 방식을 배웠다.
로스코는 변형된 이미지에 감정을 함축하는 방식의 그림을 그렸다.
이때가 초현실주의 화풍의 시대다.
로스코는 현대의 복잡하고 다양한 정신 세계를 전통적인 미술 양식으로 담아내기 힘들다고 말했다.
로스코는 고대 신화를 연구했고 프리드리히 니체의 '비극의 탄생'에 심취해 있었다.
고대 그리스의 비극들은 보는 이들을 죽음의 공포에서 구원한다는 대목에 깊이 빠졌고 신화가 미완성된 부분을 각자 보는 사람들이 채워가는 것에서 영감 받아 작품 제목에 언타이틀드를 많이 붙이게 되었다.
현실에 있는 피사체를 왜곡, 변형하던 단계에서 더 나아가 현실에 없는 피사체, 혹은 형체를 알아보기 힘든 피사체를 그리기 시작했다.
인간에게 감정을 유발하는 본질, 원형을 찾는 것에 몰두했다.
1946년 이후 로스코는 그 어떤 구상적인 느낌도 상징도 없는 추상의 끝으로 달려간다.
여러 색과 면이 층을 이루고 교차한다는 점에서 사람들은 멀티 폼이라고 불렀다.
사람들에게 위안과 위로를 주는 것.
어쩌면 그것은 따뜻하고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비극과 공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종교가 그러하듯.
결정적으로 로스코가 마티스의 영향을 받았다는 증거가 바로
마티스 작품 The Red Studio 빨간 스튜디오라는 작품을 로스코가 매일 가서 봤다는 것.
그리고 1954년 이례적으로 언타이틀드가 아닌 제목이 있는 로스코의 작품.
Mark Rothko, Homage to Matisse, 1954
마티스에게 오마주.
이걸 보고 예술적 DNA가 없다고 실망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로스코의 작품은 엄청 큰 사이즈로 가까이서 보는 것을 추천하기에 웹에서 보면서 위안과 치유를 경험하기는 힘들 것 같다.
로스코는 생전에 자신의 작품을 감상할 때 18인치, 45cm 앞에서 보라고 추천했다.
또 어떤 사람은 로스코 전시회 다녀오고 나서 우울증이 심해졌다는 이야기도 있으니...
또 작품을 보면서 화투 생각이 나고 조영남이 떠오른다는 생각을 하시는 분도 계신데 조영남 씨가 마크 로스코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하지만 마크 로스코는 자신을 추상화 화가로 칭하는 걸 끔찍하게 싫어했다고 한다.
마크 로스코의 말을 직접 들어보면 이해가 갈 것이다.
"한 가지 분명히 말하건대, 나는 추상 주의자가 아닙니다.
나는 색과 형태의 관계 따위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비극, 황홀경, 운명같이 근본적인 인간의 감정을 표현하는데
관심이 있을 뿐입니다.
많은 이들이 나의 그림을 보고 울며 주저앉는 것은
내가 이러한 근본적인 인간적 감정들을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내 그림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은
내가 그리면서 겪었던 종교적 체험을 똑같이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당신이 작품의 색채들 간의 관계만을 가지고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면
제대로 작품을 감상했다 할 수 없습니다"
1950년 포춘 지의 찬사로 비평과 인기를 동시에 거뭐진 로스코.
주위의 작가들에게서 부르조아 열망으로 그림을 팔아먹는 작가라고 비난을 받았다.
앤디 워홀의 팝 아트라는 새로운 장르가 등장하자 "돌팔이 젊은 기회주의자들"이라고 거세게 비난하기도 했다.
2019년 3월-2020년 6월까지 휴식 중.
주소: 3900 Yupon St, Houston, TX 77006 미국
완공: 1971년
위치: 1409 Sul Ross Ave., 휴스턴, 텍사스
면적: less than one acre
연락처: +1 713-524-9839
마크 로스코는 세상을 떠나기 2년 전부터 하나의 색깔로 된 작품에 몰두한다.
이는 그림 한 점이 아니라 로스코 채플이라는 미국 휴스턴에 위치한 성당을 만드는 것이다.
어두운 보라색, 짙은 갈색으로 느껴지는 그림들만 있고 십자가, 성모상 등의 어떤 성당을 요소도 없는 성당이다.
14 점의 로스코 그림으로 이뤄진 로스코 채플은 그림 뿐만 아니라 전체적인 디자인까지 로스코가 했다고 한다.
이곳은 일반에 공개되어 많은 사람들이 구경하러 왔다가 눈물을 흘리는 곳이다.
분명히 말하건대,
생명의 맥박이 느껴지지 않는
뼈와 살의 구체성을 결여한 추상이란 있을 수 없다.
고통과 환희를 제대로 다루지 못한 그림이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나는 생명의 숨결이 느껴지지 않는 그림에는 관심이 없다.
- Mark Rothko
마크 로스코는 1970년 2월 25일 자신의 스튜디오에서 손목을 긋고 세상과 이별하는데 그 당시 그렸던 유작이다.
오로지 빨간색 물감 만을 사용한 이 그림을 통해 로스코가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는 무엇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