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도전 레슬링 기획을 보며 참으로 감동스럽습니다.
무슨놈의 예능프로가 사람을 울리는가?
출연자들의 놀라운 능력과 열정은 많은 분들이 칭찬하셨을테고
전 피디로서 김태호 피디의 놀라운 능력과 열정을 칭찬하려합니다.
처음엔 유치한 예능프로그램인줄 알았지만 벼농사 기획을 보며
"어, 이 피디 장난 아니네???"
여자 복서들의 대결편에서 결과를 알려주지 않고 끝내는 편집을 보면서
"헉, 설마 예능피디가...?"
예능 피디의 편집이 절대 아닙니다.
게다가 유재석만큼이나 물오른 그의 자막... 대단한 위트와 숨겨진 메시지!
그리고 그의 기획은 예능 피디의 기획이 절대 아닙니다.
아주 오래된 훌륭한 어르신 피디들을 보면
교양 피디건, 드라마 피디건 정말 놀라운 기획을 하곤 했습니다.
어떤 피디는 화면 조정시간에 컬러바만 나가는게 썰렁하다고 최초로 음악을 깔자고 했는데
사람들이 모두 비웃었답니다.
그 이후에는 모든 방송국이 컬러바 시간에 음악을 깔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피디는 국내 최초로 섭외없이 길거리에 카메라를 가지고 나가 인터뷰라는 것을 했습니다.
ENG라는 뉴스 전용 카메라가 생긴 때였죠. 그 전에는 드라마도 모두 세트에서 했고
그보다 이전에는 생방송으로 드라마를 했었습니다.
처음으로 대본없이 안짜고 거리에서 만난 사람을 인터뷰하자는 기획, 사랑방 중계라는 프로그램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이 참신한 기획은 대성공했고 그 이후로 모든 프로그램에서 거리 인터뷰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아이디어 풍부하던 시절...
'가짜 다큐멘터리'라는 프로그램을 기획했는데 선배들은 모두 그건 틀린 말이라고 했습니다.
다큐멘터리라는 말 속에 진실이라는 의미가 들어있는데 어떻게 가짜 다큐멘터리가 존재하느냐는 거였죠.
몇개의 다큐멘터리를 만들어 보여주고 진짠지 가짠지 찾는 프로그램이라고 설명했지만
국민들에게 잘못된 정보, 혼동을 초래할 수 있다고 까였습니다.
그 이후 '진실게임'과 '진실 혹은 거짓'이라는 프로그램이 등장하고
진짜를 찾는 프로그램이 굉장히 많이 나왔었습니다.
또 한가지 안타까웠던 기획이 '세상에 이런 프로그램이'라는 기획안이었습니다.
어떤 때는 뮤지컬도 하고 어떤 때는 영화도 만들고 매주 다른 아이템을 하겠다는 기획이었는데
역시 그 당시는 윗분들이 미쳤다고 말했고 그건 기획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틀이 없는 것은 기획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근데 김태호 피디가 그걸 해냈습니다.
무한도전의 틀은 내용이 아니라 멤버였습니다.
우리보다 모자라 보이는 사람들, 혹은 우리와 같은 류의 사람들이 모여
우리에게 대리만족을 줍니다.
이 프로그램은 웬만한 내공이 없으면 한달 끌고가기도 힘든 프로그램입니다.
기획이 없는 프로그램이라고 욕먹기 딱 좋은 프로그램입니다.
근데 해냈습니다.
처음엔 유재석이 있어서 재밌는 줄 알았습니다.
좀 지나서는 바보 무리가 참 세팅 잘됐고 각자의 캐릭터가 명확히 잡혀서 캐릭터의 충돌로
뭘 해도 시트콤처럼 자연스럽게 돼버려서 재밌는 줄 알았습니다.
근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벼농사 기획을 보며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피디의 자신감과 출연자들의 신뢰가 없이는 절대 불가능한 기획입니다.
그 후에 여자 복서 두명이 대결하는 프로그램을 보았습니다.
누가 이겼는지 경기결과를 보여주지 않고 음악과 영상구성으로 끝냈습니다.
누가 이겼는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거죠.
예전에 장애인들이 모여 HOT라는 이름으로 댄스경연대회에 나가는 다큐멘터리를 연출한 적이
있습니다.
그 때 본선에 올라가 몇위를 했는지 안보여주고 그냥 끝내자고 했는데
작가부터 모든 사람들이 왜그러냐? 어디 아프냐? 욕먹으려고 환장했냐? 등등
난리를 쳤습니다.
저는 끝까지 편집을 고수했지만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걱정과 잔소리를 하는 바람에
결국은 자막으로 2등을 했다고 처리하고 말았습니다.
그들이 몇위를 했는지는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일반인들과 함께 섞여서 열심히 춤추는 상황,
다운 증후군으로 태어나서 춤은 절대 배울 수 없다고 했지만 누군가가 칭찬을 해주고
처음 들은 칭찬이 얼마나 행복한지 알았고
일반인들 속에 섞여서 함께 대결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는 것이 하고 싶은 말이었지만
2위를 했다는 자막은 두고 두고 내공이 약함에 아쉬웠던 부분이었습니다.
근데 그걸 김태호 피디는 해냈습니다.
이 프로그램이 처음부터 높은 시청률로 출발했다면 사실 별로 감동스럽지 않습니다.
하지만 초반에 시청률이 높지 않았고 생소한 모습에 거부반응을 일으켰던 것을 생각하면
김태호 피디의 뚝심과 철학은 박수를 받을만합니다.
중요한 순간에 보통 PD들은 음악을 빵빵하게 올리고
신파, 멜로의 슬픈 음악을 오버해서 삽입해 오히려 시청자를 깨게 만듭니다.
그런데 김태호 피디는 중요한 순간 모든 오디오를 내리고 묵음처리하는 것을 좋아하고
오늘 레슬링에서는 모든 멤버들의 인터뷰를 "아~~"하는 한숨만 내보냈습니다.
이게 쉬워보이지만 절대 쉽지 않은 편집입니다.
김태호 피디가 무한도전을 만든 후 모든 방송사에서는 리얼 버라이어티를 만들고 있습니다.
그 모든 프로그램들과 무한도전이 차별화되는 점이 한가지 있습니다.
다른 프로그램은 연예인이 보이지만 무한도전은 피디가 보입니다.
정형돈이 토하면서 동료들을 위해 애써 괜찮다고 하는 것,
유재석이 후배들을 걱정하는 모습,
정준하가 아픈데도 불구하고 야유를 받으며 악역을 열심히 소화하는 모습,
나이든 맏형 박명수가 못하겠다고 하면서도 무대에 나가 몸을 아끼지 않고 던지는 모습 등등
그들의 무한도전이 빛나고 감동스럽긴 하지만
진정 부각되는 것은 어떻게 레슬링을 시킬 생각을 했을까?
그리고 큐시트 상 정형돈이 힘들어하는 그 때, 그러니까 마지막 순간에 힘든 상황이 벌어질 것을
예상해서 싸이의 연예인이란 노래를 배치한 것...
"연예인이 되어 웃게 해줄게요" 에서는 소름이 끼치더군요.
화려한 무대와 무대 뒤 인간들을 교차편집하면서 영화적 장중함과
긴장도를 이끌어냈습니다.
예능 프로그램은 피디의 내공보다 출연자의 인기도가 더 중요하다는 법칙을 깨뜨린
유일한 예능 피디, 김태호!
'무한도전'은 어쩌면 김태호의 정신이며 숙제이고 인생일 듯 합니다.
오늘, 그의 무한한 도전에 팬으로서 큰 박수와 존경을 보냅니다.
사진출처 imbc.com